• 감청 1984 공연실황 (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 ) 소개

  • 22 감리교 청년회 2집 조회 : 4495
      이창학 2003/03/27
     

     

    이젠 가물거리면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오래 전 기억이다. 내 손 때가 가득 묻었던 편린들을 거의 2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서 다시 맞이하는 감회란! 처음으로 테이프 전체의 구조의 구상, 음악적인 배치와 편곡까지 모두 내 손에서 이루어진, 개인적으론 어마어마한 음악적 성과들을 훈련받을 수 있었던 소품이었다고나 할까? 60분짜리 조그만 테이프였지만 내겐 분신과 같은 소품이다. 원본 테이프를 나도 몇개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몇 번의 이사와 함께 행방조차 알 수가 없다.

    작업은 84년에 이루어졌다. 전체 구성에 대한 기본 구성은 상당히 도식적이다. 당시 대학교 4학년의 기획안에서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었겠는가? 우선 한국 사회 모순의 역사적 고찰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84년 현재로 돌아와 농민, 노동자 문제를 병렬적으로 나열하고, 그리고 모순의 폭발과 결단으로 결론을 내리는 형식이었다. 83년 겨울에 메아리 내부에서 워크샾으로 비슷한 테이프 작업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이를 바탕으로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성원들의 음악적 기본기가 본질적으로 유치한 내용구성을 감싸 안아 힘 있는 내용물로서의 외형을 가능하도록 해 주었다고 본다.

    83년 겨울 감리교 청년회 전국연합회 문화선교위원회 산하의 노래팀이 구성되었다. 당시 서울대 음대 성악과를 막 졸업한 고상미 선배와 호흡을 맞추어 83년 감리교 청년회 전국대회에서의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우린 내부 조직 정비 작업과 기독교 청년 운동 내에서의 진보적 역량의 강화와 전파를 위한 음악적 훈련과 각 청년회 지회와 교회들을 돌아다니면서 공연 작업들을 바쁘게 진행하고 있던 터였다. 이런 테이프 작업도 이런 작업의 일환이었다. 테이프 작업에는 6명이 참여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종교단체 산하의 작은 노래팀에 불과했던 이 구성원들이 이후 80년대 노래운동의 주요한 한 축들을 담당하는 주요한 활동가들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서울대 메아리 출신의 81학번인 본인과 서울대 음대 성악과 80학번의 고상미 선배, 그리고 서울대 음대 성악과 82학번이었던 장경선 (이후 노래모임 새벽의 멤버로 활동한다.), 서울대 메아리 출신의 83학번 전지용(노찾사활동, '그리운 이름'의 작곡자), 김삼연(노찾사의 대표적 가수- 노찾사 2집의 '이 산하에'를 부름), 그리고 경기대 83학번이었던 김경화가 내가 기억하는 6명이다. 그리고 녹음과 멘트, 효과 삽입등을 담당했던 당시 감리교신학대학교 방송국 소속의 81학번 친구가 있었다. 지금은 이름을 기억하기도 힘들지만.

    반주는 기타 두대와 북, 멜로디언과 같은 중간에 잠깐씩 삽입되는 악기가 있었을 뿐이다. 대부분의 반주는 지용이하고 나하고 담당을 했고, 삼연이가 잠깐씩 도와주기도 했다. 인상적인 합창 부분이다. 편곡은 음악을 전공하지도 않은 내가 고집으로 했다. 하지만 워낙 기본기가 튼튼했던 멤버들이라서 당시로서는 녹음을 끝내고 들어보면서 도저히 6명이 한번에 녹음한 작업이라고 믿기질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들어보니 부실함이 느껴지는 것은 격세지감이라고나 할까? 녹음 하는 여름 내내 비가 억수로 왔다. 84년 여름에 큰 홍수가 있었음을 난 이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쏟아지던 비를 뚫고 서대문 육교 건너서 감리교 신학대학 언덕을 오르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눅눅한 녹음실 갇혀서 우린 그렇게 젊은 시절의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목록   Prev이전 다음next

     



     

     

    자유게시판
    자료공유
    음반을듣고
     
    문서자료실
    앨범소개
    앨범소개(외국)
     
    밥자유평등평화
    공지사항